역사적재조명전

역사적 재조명전 사업취지 및 사업목적

● 사업취지
  여수는 여순사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잔존으로 인한 지역내 반목과 갈등의 관계가 지속되었고 역사적 재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레드컴플렉스가 상존하는 시대적 아픔을 극복할 방안 모색이 필요하였고 그 대안으로 문화예술인들의 힘을 모아서 화해와 상생을 모색할 수 있는 이 시대의 평화와 인권 문제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분단조국의 통일과업을 이루고자 기획된 사업이다.

● 사업목적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우리 지역의 여순사건에 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 분쟁의 상흔적 아픔을 극복하고 시대 인식에 대한 통찰과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예술활동을 통해 평화와 인권의 문제를 재고하며 분단국가의 숙원 과제인 통일의 문제를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고자 함.

 ■ 여순항쟁 역사적 재조명전 기획 취지문

역사와 관련한 미술의 역할은 상상력이란 방법론을 통하여 그 역사적 사건, 사실의 배후와 그 의미에 대한 성찰을 담는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상력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무한한 인식의 지평 속에서 당시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 당시 사건의 진상을 경험하고 그러한 결과를 다양한 조형언어 및 시각매체를 통하여 표현하는 일이 현대적 의미의 역사미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순사건이 일어난지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주 4.3항쟁이나 광주 5.18민중항쟁들이 그 지역민을 중심으로 명예가 회복되어가는 시점에서 유독 여순사건 부분만은 역사 속에서침묵하고 지역의 가슴 아리로 남아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매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도움으로 여순사건의 현장 답사 및 증인탐방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학살 유적지에서 만난 원혼들은 우리들에게 말했습니다. 가혹한 미군정의 학정과 단선, 단정의 추진과정에서 처절하게 사라지거나 삭제 당한 역사의 원혼들을 우리는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영혼과 진실을 치유하지 못한 체 오늘을 살아가는 미술인으로서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뿐이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자료를 모우고 도움을 받아 공부하면서 창작의 힘을 얻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수 그 뒷면에 오래도록 비어있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그 풍경을 지우고 다시 채우는 일의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미국을 등에 업고 화려하게 나타나 권력을 장악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음모는 동포에 대한 가혹한 시련과 암울한 역사를 낳았습니다. “제주놈들은 모조리 죽이시오,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버려라. ” 대한민국을 위해...  권력자들이 했던 일은 이렇듯 충격적이고, 잔악무도한 학살이었습니다. 모래알 공화국, 드드득 공화국은 이렇듯 우리 안에 3.8선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전라도의 행정 관할 구역권에 속해 있었던 관계로 같은 도민의식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전라도 민중의 억울한 죽음과 희생 앞에 총 뿌리를 겨누기 위해 양심의 바다를 넘을 수 없었던 군인들이나 여수사람들을 우리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좌익, 우익으로만 나누어 삶과 죽음을 결정하고 강요당한 두려움의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여순사건 “역사적 재조명전”은 삭제 당하고 침묵하는 당시의 역사를 오늘에 깨워 살리는 일입니다. 그러한 역사의 아픈 울타리를 걷어내고 그 암울했던 벼랑 끝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염원이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를 끊임없이 되묻는 성찰의 역사, 상생과 평화 그리고 인권를 위한 미술전이기를 기대
하며 미술인 양심과 자유의 몸짓으로 전시회의 포문을 열고자 합니다.

여순항쟁미술창작단

역사적 재조명전 (200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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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침묵의 세월
응시

여순사건에 대한 작품을 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대학때 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몇 작품을 하지 못하고, 일상 생활을 핑계로 무심한 세월만 16년이 지나버리고 말았다. 몇 년전만 해도 여순반란사건이 교과서 용어였지만 지금은 '반란'이란 단어가 빠진 여순사건으로 명명되어지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언젠가는 역사와 민족 앞에  이름 없이 쓰러져 간 민중들의 저항과 그 원혼들이 말 못하고 세월에 묻혀 온 침묵의 시간들을 제대로 응시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되었다. "침묵의 세월"과 "응시"는 그런 의미에서 제작된 오래 전의 작품으로 56년만에 여순사건을 주제로 하는 전시에 여러 작가와 함께 세상에 보여지게 되어 참으로 희망적이다.

전야의 불바다

"이게, 뭔 일이여!"
"오메, 이게 난리가 났구먼 난리가 났어."

57년전 여수는 시내가 전야의 불바다가 되어버린 참혹한 시간이 있었다.
이념도 모르는 체 닥쳐오는 혼란 속에 당황했던 그 모습이 현재에도 상상 속에서 머물지 않고 우리들의 상흔의 시간으로 남아있다.
이유도 모르는 체 닥쳐오는 죽음들 앞에 해방의 기쁨도 만끽하지 못하고 혼란과 두려움 속에 민족의 생존과 통일에 대한 한가닥의 희망을 가져던 소박한 민중들에게 그 당시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권력에만 눈이 어두워 민심을 외면하였고 씻을 수 없는 과거사의 오점을 남겼다.
전야의 불바다는 그 당시 사람들의 불안감과 공포감 그리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왜! 그들이 이유없이 당하는 억울한 심정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11년전에 나는 그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신 향토사학자 김계유 선생님께 체험담을 들었다.
그 이야기 속에 내용을 이제서야 그리게 된 작품이다. 

손가락 총의 공포
진혼넋춤

세상이 변하고 있다.
한때 권력에 의해 반란이란 이름이 이제는 사건으로...
그러나 사건이 아니라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우리의 역사가 힘의 논리에 의한 정치이데올로기 관점이 아닌 민족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역사관의 전회라고나 할까.
나는 힘의 논리로 억압받었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지금도 여순지역사람들은 세월의 변화도 모르고 서슴없이 반란이고 말한다.
얼마나 지독하게 세뇌된 용어인가를 생각하면 머리끝이 설려고한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그렇다손치더라도 젊은 사람들도 의외로 반란이라고 말했다가 되바꾸기 일쑤다.
왜! 반란이냐고 물으면 머쓱하게 답을 못한다. 그냥 그렇게 세월속에 묻혀져서 불려지는 것이다.
그러니 사건에서 항쟁이란 용어는 얼마나 어려운 용어겠는가!

이제 국가가 나서서 과거사를 정리하겠다고 한다. 얼마나 좋은 결과가 나타날지는 미지수이겠지만 우리는 한가닥의 희망을 걸어본다. 최소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오명은 벗고 명예가 회복되기를....

그리고 나의 그림이 그 당시에 손가락총 하나에 목숨이 오고가는 무서운 공포 속에서 억울하게 죽은 넋을 위로하고 새로운 세상에서는 인권이 권력에 의해 학살되는 끔찍한 일이 없는 평화와 상생의 땅에서 다시 부활하여 이땅에 자유와 인권이 살아숨쉬는 참세상이 되기를 기원한다.

공포의 손가락총! 이 시대에도 이런 일들이 또다시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
또다시 한민족끼리 서로 총을 들이대는 정치권력의 희생양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상식과 대화가 통하는 사회, 인권과 상생, 평화와 통일은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보편적 이상이다.

원한서린 공포의 그날
통곡의 산을 넘어 평화와 상생으로 만나리라

여순항쟁이 과거사위원회에서 역사적 평가를 어떻게 결론 내릴 것인지 기다리는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그 당시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서 구천길을 떠돌고 있을 원혼들은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떤 시각, 어떤 잣대로 보고 재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뀔지도 모르는 여순항쟁의 역사적 평가 앞에 살아있는 우리들은 조심스런 마음이 앞서는 것은 그 당시 모두가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우리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 앞에 총을 겨눌 수 없었던 민심과 사회적 질서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중요했던 충정들이 공존하던 시절에 올바른 가치판단은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졌을까!
혼돈과 고통 속에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며 행동했던 김구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들을 하나 하나 되새겨 불러 보았다.
살벌했던 공포의 그 날,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원통해 하며 죽어야 했을까!
통곡의 산을 넘어서 이제는 이 땅에 정권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권이 유린당하고 생명이 경시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그들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상생할 수 있는 평화의 땅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며 그림을 그려 보았다.

애기섬-수장

1949년 6월 5일부터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촤익 성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는데, 여수의 보도연맹원들은 거의 여순사건 관련자들이었다.
보도연맹은 좌익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으로 1949년말까지 가입자는 전국적으로 30만명에 달했으며, 결성 목적이 좌익세력을 통제하고 회유하려는 것이었다.
여수의 경우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보도연맹원들을 여수경찰서 무덕관에 집결시킨 후에 경남 남해도 남단에 있는 애기섬으로 끌고 가서 총살하고 수장하였다. 당시 특무대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애기섬 희생자는 약 120명 정도 될 것이라고 추정한다.
공권력이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 얼마나 잔인한 학살을 감행하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잔인한 트라우마

해방정국에서 민주화가 되기까지 한국 사회는 정치적인 이념 갈등으로 레드컴플렉스 프레임이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문화예술계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뜻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였다. 여수도 여순항쟁의 역사적 가치를 뒤흔드는 레드컴플렉스와 일명 여수판 블랙리스트라고 불리울 수 있는 문화행정의 적폐가 오랜 세월 동안 있어 왔다. 인간에게 예술의 자유와 상상의 세계를 짓밟은 잔인한 트라우마를 표현하고 싶었고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만성리굴의 원혼

만성리굴은 자연 암반을 파서 만든 굴로 일제 때 우리 지역 사람들이 동원되어 특별한 도구 없이 맨손과 정으로 팠다고 하는데 지금도 얼마나 단단한지 온전하게 그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다. 일제때 동원된 인력이 만든 이 굴은 여수사람들에게 가슴 아픈 여순항쟁의 역사 현장으로 이어지는 만성리 학살지와 형제묘에 이르는 곳이다. 어렸을 적 내 기억의 만성리굴 암벽에서 소스라치게 느껴지는 원혼들의 형상을 더듬어 그려본다.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되살아나지 않았으면 한다.

봉인된 여수밤바다

2012 여수세계박람회 이후, 여수밤바다는 전국 관광명소로 핫하게 뜨면서 위기의 코로나 시기에도 주말이면 외부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제주 4.3전 "봉인동 풍경" 주제를 받고 보니 여순사건이 발발한지 74년이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역사의 아픈 흔적을 여수시민이나 관광객들은 화려한 여수밤바다 이면에 74년 전 여수의 상흔을 얼마나 알까 싶어지면서 내 작업은 시작되었고 여수밤바다에 봉인된 여순사건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싶어서 나는 지금, 그 때 그 억울한 사람들의 죽음의 바다를 그리고 있다.

한날한시 제사상

'빨치산 동조자'라는 이유로 주민 22명이 몰살을 당했다는 순천 낙안면 신전마을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간직한 아픔이 있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무장대가 마을 주민들에게 14세 소년의 부상을 치료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화근이 되어서 군인들이 주민들을 빨치산 부역자로 규정하면서 무고한 학살이 벌어졌고 이 마을은 그 날 이후 추석이 사라졌다고 하니 기가 막힌 통탄의 세월이다. 그래서 언젠가 부터 사람들은 "한날한시 제사상"을 차린다는 말을 듣고서 국가폭력에 대한 트라우마와 제사상이 갖는 의미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애끓은 사랑

여순사건 특별법이 2021년 6월 29일 국회를 통과되었지만, 여순을 주제로 작품을 대할 때 마다 속 시원하게 풀리지 못하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에 대한 역사왜곡과 편향적 이념 갈등 구조를 지켜보는 유족들의 애끓은 마음이 항상 떠올랐다. 올해 75주기에는 지난 혹독한 한파에도 꿋꿋하게 동백꽃이 피고, 땅에 떨어져서도 꽃을 피듯이 상생과 화해의 애끓은 사랑의 마음이 꽃 피기를 희망해 본다.